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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26일 밤. 가평군 홍적리 인근에서 한국전쟁에 참전중이던 미국 남부 유타주의 213야전 포병대대 소속 방위군은 24보병사단 21보병연대 포격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공격 중이던 보병부대가 적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전진해 버리자 포병부대는 엄호없이 고립되어 버렸다. 유타주 서밋 카운티 출신인 J.Frank Dalley 중령은 부하의 안전에 대하여 막중한 책임감을 느꼇다. 600명의 장병은 유타주의 작은마을 Cedar시, Fillmore,Beaver, St.George 및 Richfield 출신이였다. 이들은 장교 몇명을 제외하고 모두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하고 단련된 병사가 아니라 학자이자 농부이며 점잖고 존경할만한 사람들로서 우리의 형제이자 사촌이며 삼촌이자 조카이고 친척이자 평생의 친구들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족을 위해 보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며 자신들이 임무를 완수해 낸다면 자녀들이 무사할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보병부대에 포위된것을 알게 된 4천명의 중공군들은 240명의 본부및 본부포대와 A포대( Cedar시와 Richfield출신으로 구성된 부대) 가 지키고 있는 좁은 계곡으로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중공군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른 아침 벌어진 생존을 위한 전투는 치열하였다. 어둠 속에서 육박전이 벌어졌으나 240명의 용사들은 기적적으로 진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새벽이 되자 Ray Cox 대위는105mm 곡사포를 탱크삼아 두 포병부대에서 차출된 병사로 구성된 전투순찰대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그의 지휘에 따라 순찰대는 수많은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수많은 적들을 살상하면서 계곡을 돌진해 내려갔다. 적들은 마침내 퇴각하여 치열한 집중포격속에 주변의 언덕으로 기어오르려 하였다. 하지만 괴멸적인 포격에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들은 돌아서서 집단으로 투항하였다. 수백명의 적들은 중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사망하였지만 213 부대원들은 단 한 명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350명의 적군이 사망하고 830명 이상이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