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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지구전투 = 가평지구전투 1951년 4월 23일 중공군의 제5차 공세시에 사창리지역 국군 제6사단 방어전선이 돌파되어 중공군 제20군이 가평방면으로 돌파해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영연방(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 27여단이 전투에 참여해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내 중공군의 5차 공세를 완전히 좌절시켜 북한강을 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고 국군과 UN군은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평은 한국전쟁 역사에서 거대한 전투의 장이 되었고 영연방 27여단은 세계전쟁사에 길이 빛날 대승을 거두었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매년 4월 마지막주에 역사의 땅 가평을 찾아 거행하고 있다. * 날짜 : 1951년 4월 23일 ~ 4월 25일 * 장소 : 가평군 가평천 일대 * 교전국 : - 아군 : 대한민국(제6사단), 미국(제5기병대), 영국(미들섹스대대), 호주(왕립호주연대3대대), 뉴질랜드(16포병연대), 캐나다(프린세스 패트리샤2대대) - 적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제20군) * 결과 : 아군(유엔군)의 승리 ◀ 영연방 4국[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 : ▶ 9만5천명 참전, 1,750명 전사, 7,500여명의 인명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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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산전투 = 용문산전투는 1951년 5월 17일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방향을 바꿔 홍천-인제와 횡성-원주방면이 교차되는 육상교통로의 요지인 가평군 용문산일대의 점령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제6사단(장도영 준장) 중 2연대가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5월 18일 중공군의 막강한 공세로 후퇴가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나 후퇴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며 항전하였다. 이에 중공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2연대가 주력부대인 것으로 착각해 중공군 63군 예ㅏ 187,188사단과 189예비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한다. 고립된 국군 6사단 2연대는 악전고투속에 진지를 고수하여 힘겹게 방어하고 있었다. 2연대의 완강한 저항을 주력군으로 착각한 중공군에 대해 국군 제6사단의 7,19연대는 후방을 기습, 섬멸작전을 전개하였고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섬멸의 위기에 처하자 퇴각하였고 파로호에서 퇴로가 막혀 격멸당하게 된다. 사주방어 신화로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둔 용문산 전투는 현재 동부지역 휴전선까지 진격할 수 있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휴전제안의 계기가 되었다. * 날짜 : 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 * 장소 : 가평군 용문산 일대 351고지, 427고지 * 교전국 - 아군 : 대한민국(제6사단 2연대, 7 연대, 19연대) - 적군 : 중화인민공화국(63군예하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 * 결과 : 아군(제6사단)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