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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가월증하자 1928년 9월 교직을 떠나 심산유곡에 은둔 수도함이 대사를 성취할것이라 결단하고 전재산을 봉은사에 헌납하고 단신으로 금강산 안양암에 주석하여 오로지 수행에만 힘쓰셨다. 기도의 전후에는 반드시 발원사가 있었으니 천상천하 세계중생이 다 서로 싸워서 죄를 짓지말고 그 바라는 한마음을 부처님 전에 환희심을 내어 복을 많이 짓고 밝은날과 같이 시봉을 다 잘하기를 제도발원이라 하며 축복을 하는것이 의식화하셨다. 그리고 설교때에는 당초에 진심(瞋心)을 내지말고 진심을 닦아야 성불하느니라는 말과 또는 현재 현재에 진실하면 미래미래는 완성되느니라 하셨다. 일과중에는 ○○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는 염원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을 일심으로 창송을 복하셨다. 점차 따르는 학인이 많아지니 목사 지사 도인 술객등도 입문하게되어 처소가 좁아 넓은 도장을 찾아 지장암으로 법좌를 옮기니 유지 수사들이 운집하여 소원이 성취되는것 같고 인앙생활이 곧 조모의 품처럼 온기를 느끼제 되어 10년을 하루같이 자신이 넘치는 영감의 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결국은 첩첩산중에까지 일경의 마수가 뻗치게되어 1939년에 귀경 돈암동 자택에서 좌선수도하시면서 피신 대기하시다가 1945년 8월 광복 격동기를 맞아 중앙공작대를 결성하여 독립촉성을 중와에 선포하고 이승만박사를 보좌하며 건국운동에 참여하셨다. 1950년 2월 내무부장관에 취임하여 동란을 맞아 요격조치를 뜻하고 7월에 사임하셨다. 1951년 10월 우리 동국대학교 동창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에 추대되셨고 1853년 8월에는 모교 제2대총장에 취임하셨다. 선생은 동란으로 폐허화된 교사신축에 주력하시어 남산 북울기지 4만여평땅에 입주하여 대학본부를 비롯한 강의실 도서관과 연구실 과학관및 부속건물등 만여평의 건물과 실습농장과 연습림을 구입하여 6년만에 건설하는 한편 해이된 교풍의 진작과 교세확장에 역량을 기울여 종합대학교의 중흥주가 되셨다. 1953년 5월 10월 정영재여사와 결혼하여 2녀를 얻어니 장녀 일수는 치과의이고 차녀 영수는 조각가이다. 1954년 5월에는 에는 재단과 대학의 일원화를 꾀해 동국학원이사장까지 맡으시어 우리 모교를 동국의 동국학교로 다시 섰으니 오늘의 우림스런 동대의 기상은 선생의 울력으로 빚어진 삼보의 도장이다. 특히 학생의 교양부식을 위한 문화사특강은 물론 금강경강의는 높깊은 자리개발의 원위가 되었으며 대학원생에게는 화론좌송보장경과 화엄경등 강의는 감명을 크게 주셨다. 또한 고려대장경과 국역불전의 영인보전은 지금에 이르도록 그 위업을 두루 칭송하고있다. 1961년 6월 총장직을 물러나신뒤 명예교수로 계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