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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겸 선생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길찬범(吉贊範) 의진에 참여하여 충남 직산(稷山)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그것은 1907년 7월「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장원겸은 이같은 시기인 1907년 박홍석(朴弘錫) 등과 함께 길찬범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8월 14일 동료 의병 수십 명과 더불어 충남 직산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병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1909년 5월 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