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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흥농민봉기는 7월 28일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성우경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일본은 조선 정부를 협박하여 경부선 부설권을 독점한 뒤, 1901년(고종 38) 경부선 공사에 착공하여 1904년 개통하였다. 일제는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영등포~수원 간 공사에 시흥군민을 강제로 동원하는 한편, 철도 연변(沿邊)의 토지를 무상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군민들은 일제의 탄압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우경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탈과 친일 관리들의 비행에 분개하여 2,000여 명의 군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2차 시흥농민봉기를 일으켰다. 먼저 1904년 9월 13일까지 6개 면 집강들에게 봉기 계획을 전달하는 한편, 시흥군내의 모든 가구마다 1명씩 반드시 집회에 참여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9월 14일 수천여 군민이 읍내 한천(漢川) 변에 집결하여 성유경의 사회로 집회를 열고 노무자를 모집한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였다. 집회에 참가한 군민들은 이날 오후 3시경 시흥 관아로 몰려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