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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사 편강렬 의사는 서기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에서 한학자 편상훈의 4남 중 3남으로 나시니 시조 갈송의 15세손이요, 본관은 절강이다. 어려서부터 영민담대하고 기우가 웅위하였다. 14세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두문단식으로 항거하였고 16세에 토왜복권의 義幟(의치)가 일어나니 남도의 의병장 이강년의 진영에 들어가 소모장과 선봉장이 되다. 17세 무신초에 13도 창의군의 서울 대탈환 작전에 참가 경기 양주에서 격전 중 부상 백형 수열의 인도로 귀가하다. 19세에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 지하 공작 등으로 항일운동에 정진하였고 한일합방 후인 1911년 조선 총독 寺內正毅(테라우찌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사건으로 피검 3년간의 옥고를 치르니 소위 105인 사건이다. 23세에 출옥 영남 일원의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회를 조직하고 친일 민족반역자와 일본경찰을 처단하는 투쟁을 전개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남에 해서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친제 덕렬을 상해임시정부에 파견 국내 조직과의 연락을 도모하다. 임시정부가 항일무장투쟁의 국내 거점 확보를 위해 9월산 주비단을 조직하자 황해도 대표로 피선 활동하던 중 재차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1년 반의 옥고를 치르다. 1923년 1월 동지 김강배 김태규 조종호 등과 중국의 독립운동 상황파악을 위해 북경 상해 만주 등지를 순방하다. 동년 10월 만주의 강진지 양기탁 남정 등과 봉천성 회덕현 오가자에서 무력행동단체인 의성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선임되어 조직 훈련 등 임무를 직접 담당 지도하다. 길림성과 장춘 일대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진력하는 일방 동포에 대한 선무공작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쓰다. 6명의 단원으로 장춘성 내 일본 영사관을 습격 격전 끝에 60여 명을 사살하고 대원 3명으로 봉천의 일본경찰서와 만철병원을 습격하였으며 우체국 철도 군수기지 등을 파괴한 것은 대표적인 전과이다. 의사는 난립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 강력한 군사조직화를 목적으로 서로군정서 통의부 구국단 길림 주민회 등과 상호 연락하는 일방 상해의 안창호 남북 만주의 양기탁을 중심으로 통합을 도모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와 각 단체가 제휴 전만통일주비회를 조직하다. 1924년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 길림으로 복귀하던 중 하얼빈역에서 일본경찰의 밀정 승정윤 김성곤 배목사의 밀고로 왜경에게 체포되다. 신의주로 이송된 의사는 다시 투옥되고 평양의 왜법정은 일본 귀화를 강권하였으나 寧爲斷頭○不作降倭身의 시로 단호히 거절하다. 1925년 왜법정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감옥에서 복역중 심한 고문으로 인한 척수염으로 1926년 보석되어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병세는 악화되다. 왜인의 천엽병원으로 전원을 권고하였으나 왜인병원이라는 이유로 불응하고 길림으로 가던 중 안동 적십자병원에서 사후 백골은 만주에 묻어주고 조국 광복 전에는 고토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니 때는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