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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석은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9년 함흥군 함흥면(咸興面)내에 있는 사립(私立) 영신학교(永信學校) 교사로 있을 때, 평양(平壤) 숭실학교(崇實學校) 교사인 강봉우(姜鳳羽)가 함흥으로 와서 기독교계 간부들을 모아놓고 국권회복에 관해 연설을 하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결심하였다. 같은 해 2월 28일 기독교예배당(基督敎禮拜堂)에 모인 이근재(李根哉)·한영호(韓泳鎬) 등이 함흥 장날인 3월 3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는 계획에 참가, 독립선언서 3,000여매를 등사하고 태극기 10여매를 제작하는 한편, 학생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책임부서를 정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거사 당일 아침에 일경에게 시위계획이 탄로되어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교편을 잡으면서 은밀히 한국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으며, 1938년에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