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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한말 육군 참위(參尉)로서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통분하여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일군을 대파하였으나 부상을 당하고 은신하였다가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사단장으로서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단기속성 사관학교인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서 김좌진·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 등과 함께 전력을 다하여 청년교육에 정진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의 제2연대(연대장 김좌진) 제1대대장으로서 전투에 참여하여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뒤 밀산(密山)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재간도 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야단(野團) 등 여러 단체의 군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고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이 각각 취임하였으며 그는 총사령에 취임하여 참모총장 이장녕(李章寧)·여단장 이청천(李靑天)이하 3,50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노령의 자유시(自由市)로 갔다. 자유시에서 비참한 사건을 겪은 그는 다시 소만국경을 넘어 옛 근거지인 연길현(延吉縣)으로 돌아왔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1922년 3월 3백명의 독립군이 소만국경으로 이전하여 추위와 식량난으로 무한한 고통에 있다는 급보가 도착하자 그 구제에 노력하였으며 상해노병회(上海勞兵會)에서도 50원을 모집하여 독립군에게 보냈다. 이와 같이 하여 물질적인 역경을 겨우 면한 그는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명성을 날린 청년 전략가 이범석(李範奭)을 맞이하여 1923년 5월에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선출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제도를 실시하여 농사를 짓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소련령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김 혁(金赫) 등이 북구 영안현(北溝寧安縣)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이념(理念)과 사상으로 무장한 독립투쟁을 위하여 각계의 혁신적인 대표들이 모여 양기탁(梁起鐸)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이 동년 4월 5일 길림성 영남(領南)호텔에서 조직되자, 그 중앙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조직 당시의 당원수는 약 1천 5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항일투쟁은 2세 국민들의 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연길현(延吉縣)에 학교를 설립하고, 그 운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31년 4월 10일 주하현(珠河縣)으로 가서 최악(崔岳)·홍진(洪震)·신숙(申肅) 등을 만났다. 이때 공산주의로 전향한 최악(崔岳)은, 독립군의 호장군(虎將軍)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를 제거하도록 사주하여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그는 공산계열의 동족인 일당에 의하여 이역 땅에서 무참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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