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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부유기뢰 폭파작전에 참전하였고 적의 포탄이 비오듯 각열하던 교동도 앞바다 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인천2함대와 포항경비부 사령관직을 역임하면서 서해와 동해의 해상경비로 국토를 방위하였다. 진해통제부 사령관과 경남지구 계엄분소장으로서 국내 치안을 안정시켰다. 2. 공창장(정비창장) 재직시에 진해서 발전을 위하여 새마을운동의 지원으로 1962년에 풍호저수지의 통수관설치에 기술과 물자를 지워하여 미곡증산에 기여하였고 도천초등학교에 교실의 창문 벽 수영장 운동시설등을 보수하여 어린이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해시내에 고아 약30명에게 군용지 약300평을 빌려서 군의 폐품으로 숙소 식당 채소밭 운동장등을 만들어 화랑원으로 명명하고 미 고문단의 협조로 양돈과 채소재배를 하고 군대에 입대할때까지 자활하게 하여 청소년들이 불량화되는 것을 방지하여 발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선도하였다. 3. 사회체육분야에도 취미를 작고 진해테니스클럽을 조직하여 회장서 회원들의 체력과 기술향상에 노력하고 코트가 부족하여진해에 제1호로 코트를 동문과 병원분원사이에 설치하였다. 도시대항 진해 마산 진주 부산 테니스 대회도 개최하였다. 국가대표 선수로 양성하기위해 소질있는 선수들의 발굴 육성을 위하여 손성균와 전병길을 공창(정비창) 문관으로 채용하여 훈련함으로써 동남아 테니스대회에 출전하여 준우승의 영예로 국위를 선양하였다. 대한체육회 연식정구협회를 동기훈련 장소로 코트를 사용할수 있도록 하는 등 체육진흥에 기여하였다. 4. 애향정신과 조상숭배정신 또한 투철하여 고향의 수기초등학교와 산의분교에 미국 해외 원조기관의 지원을 유치해서 각학교에 3개씩, 6개??건축하여 산의분교를 정식으로 초등학교를 승격시킴으로써 학생들의 가까운 거리에서 통학하여 편안하게 공부하도록 하였고 교가도 초등학교 동기생인 안보성교사가 작사하고 교육사령관 재직시 나의 소속 군악학교장 남궁효열(南宫曉悦) 소령이작곡하였다. 평해공종친회에 이사로 재직 중에 후손을 위하여 장학회 설립을 발기하여 찬조금을 내어서 장학회를 설립하였고, 경남 사천군에 안장된 숙부인 양주허씨 시제에 평소에는 물론 한국전쟁중에 공비가의 출몰로 위험한 시기에 무장을 한채 참배함으로써 조상숭배사상을 앙양하였고 특히 전란 중 혼란을 틈탄 주민들의 도벌을 예방하였다. 5. 예비역 편입후에 국토해양부 해양안전심판원 소속으로 목포와 인천지방심판원장과 중앙원장(차관보급)에 12년간 근무하면서 해양안전과 심판원의 지위향상 심판관 직급향상에 기여하였고 공정하고 과학적인 심판을 위해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