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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운 후 다시 귀국하여 수원 상업회의소에 근무하다가.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사직한 후 미국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수원 삼일남녀학교(三一男女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또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던 중,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11일 서울 당주동의 박희도로부터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달 21일에는 이갑성의 집에서 독립선언의 방법으로 천도교측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기독교측 대표들의 철야회합에 참가하였다. 이 때 그는 이 문제를 이인환과 함태영에게 일임하고 지방의 동지 규합을 위해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충청남도와 고향인 수원·이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4일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한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지 규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도 주도급 인물로 3월 13일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다음 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감한 뒤에도 교육사업을 위하여 재산가인 홍사훈을 설득하여, 수원 상업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육을 통한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광복과 함께 자신이 건립한 수원 상업학교 사택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