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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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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원인 김철수·윤창석 등 11명의 대표들과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있던 유지들에게 우송한 후 일경에게 피체되어 1919년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 7월 15일형을 언도받았으며 2심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23년 2월 2일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서 개조파에 속하여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나 국민 대표회의 분열로 인하여 활동이 중단되자 1924년 봄 중국 길림성 반석현으로 가서 김동삼·김원식과 재만농민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로 《노동보》를 발간하였다 동년 4월 5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청년동맹회 결성에 참가하여 조직의 집행위원과 상무위원 및 정치사회연구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고 9월 27일에는 길림성 길림지방에서 조직된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의 창립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길림성 반석현의 한족노동당에서 중국지역에 거류하는 한인들에 대한 보호를 위해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8년 5월 12일 정의부 참의부·신민부(新民府)의 3부 대표들이 이청천(李靑天)·김좌진·김동삼과 함께 길림성 반석현의 영고탑에서 회합을 가지고 통합단체로서 전민족유일당조직책진회를 구성하여 각당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결렬됨으로 1928년 12월 책진회측에서 혁신의회를 결성하였을 때 정의부를 탈퇴하고 김동삼 계열에 속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2월 10일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과 함께 중국 남경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인 ‘한중연합토일군’의 조직을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며 대일한중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또한 중국 동삼성 소재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등 6명과 중국 상해에 있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신익희(申翼熙) 등 5명이 남경에서 회합하여 통합을 결정하고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할 때 신익희·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상무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5일 5당통합(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후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는데 이때 그는 이 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이정호·김약산과 ‘외교대표파견안’을 제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고 미국 소련 영국 등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외교적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1943년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윤기섭·조소앙·신익희·손두환·박건웅·김성숙·김재호 등 15인으로 구성된 선전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고, 1944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및 민족혁명당 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제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중경에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복후 반민특위 위원장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