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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권기일 선생 순국 기념비 여기 대곡마을은 꺼져 가는 민족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 몸 바친 추산 權寄鎰(권기일) 1886∼1920)선생이 나실 곳이다. 안동권씨 副正公派(부정공파)의 후예인 선생은 可徵(가징)공 이후 10대째 맏집을 이은 胄孫(주손)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친 洙道(수도)공과 모친을 여의고, 조부 憲鳳(헌봉: 통훈대부 사근도참판)공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1910년 나라를 잃자 안동의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먼길을 떠났고, 선생도 그 길을 택하였다. 가슴에 타오르는 민족사랑의 열기가 그를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부모를 남겨준 채 가족을 이끌고 1912년 3월 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에 도착한 선생은 이상룡 김동삼을 비롯한 선배들이 결성한 정학사에 합류하였고,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의 지역대표일 區正(구정)과 교육회 위원으로 활등하면서 독립전쟁의 바탕이 되는 동포사회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독립자금을 수송하다가 1917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키워낸 독립군이 봉오동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1920년에 일본군이 동포사회를 짓밟으니,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그 와중에 선생도 1920년 8월 15일 길림성 유하혈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으니, 망명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나라를 되찾으려 35세 젊음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추산선생!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숨결 이 배어 있는 이 마을에 돌을 세우노니 모두 옷깃을 여이고 귀 기울여 보라. 민족적 양심과 역사적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선생은 지금도 깨우치고 계시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