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age


20page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니 때는 1912년 1월 이었다. 이로부터 가사를 아우 희섭에게 맡기고 경향각지의 동지를 규합하여 1919년 기미 3.1운동에 참가하고 이듬해 8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만중로 제국을 주류하면서 상해를 거점으로 삼아 동지와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1922년 3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이듬해 상해로부터 폭탄을 반입하여 놈들의 고관과 중요기구를 일거에 분쇄할것을 꾀했으나 거사직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모두 피체되고 의사는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의열단 밀파원의 중책을 띠고 일본 구주에 잠입하였다. 1924년초에 왜황의 국회참석을 계기하여 일탄을 던지려 했으나 무기연기로 더 지체할수없어 드디어 니주바시(이중교)에 잠입하여 왜황의 궁전을 향해 잇달아 3탄을 던졌으나 습기로 인하여 모두 불발되고 마침내 놈들에게 피체되어 무기형으로 이치가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26년 치바로 이감되어 아우에게 편지와 아관이란 자필원고를 보내 영결하고 마침내 옥중에서 45세를 일기로하여 한 많은 일생을 끝내었으니 때는 1928년 무진 1월 29일이었다. 다비하여 선산 기슭에 권조하였으나 왜금으로 성분도 못한채 을유광복을 맞이하여 사회장으로 예천법장산에 이장하였다. 부인 예천권씨는 초윤문해의 후손 형원의 딸이요 아들 재휴는 희섭의 장남으로 입계하였고 손자는 두현, 광현, 사현이요 손서는 조정희 고경환 금규오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고 1971년에는 영호루앞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묘비는 오히려 갖추지 못했다. 이제 재휴군이 다시금 묘소를 접장의 동남쪽 졸좌원으로 옮기고 일갈을 세울제 추강유고를 받들어 가원에게 글을 청한다. 감히 이를 상고하여 서술하고 의사의 옥중시 한편을 뒤에 새겨 명에 대하기로 한다. 아 아 슬프외다. 의사는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왜추의 간담을 싸늘케하고 육주에 의성을 떨쳤으 니 동양역사에 있어 저 형경 장자방과 함께 청사에 길이 길이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