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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밀양폭탄사건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고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서 1922년 5월경, 국내에서의 일대 암살파괴 거사를 단행하여 독립운동의 새 기운을 불러일으킬 것을 구상하고 당원 동지이고 임시정부 외무차장이며 의열단 고문이기도 한 장건상과 의논하였다. 이어서 장건상이 김원봉에게 연락하여 상의한 결과, 그 구상대로 대규모의 총공격형 암살파괴 거사를 추진하여 실행하기로 쉽게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김원봉이 천진에서 추진과정 전반에 걸쳐 총지휘하고, 김시현이 무기반입과 거사실행을 책임지는 행동대장 역을 맡기로 하였다. 2월초 김 의사는 톈진에서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단재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등을 전달받았다. 그리고는 평소 자신을 추종하던 황옥(黃鈺) 경부(警部, 현 경정)의 도움을 받아 이를 국내로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였다. 일행 중에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복역기간은 5년 5개월)받았다. 이른바 '의열단 사건'(또는 ‘황옥경부사건’)이다.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김 의사는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 후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 지도부와 재결합하였는데, 당시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 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김 의사는 베이징 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동지와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가 살인미수혐의로 체포돼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 9월 출옥 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김 의사는 역시 항일투쟁과 뒤이은 피체, 구속, 그리고 감옥생활을 다시 반복하였다. 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구금돼 있었다. 이후 경성 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 의사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 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베이징 헌병대에 다시 체포된 김 의사는 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 의사는 일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