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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誠齋) 이명우(1872~1920) 선생은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에서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4세에 봉화 닭실[유곡(酉谷)]마을의 안동 권씨 권성(權姓, 1868~1920)과 혼인했다. 그는 189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니 마지막 과거에 급제했던 전통 유림의 마지막 세대였던 셈이다. 이듬해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를 당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끝내 나라가 망하자 그는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려 했으나 아직 부모가 살아있어 그 뜻을 잠시 접어 두었다. 1918년 10월(음력) 모친상에 이어 12월에 고종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상을 치르고 아침저녁으로 망곡(望哭)하며 세월을 보냈다. 마침내 탈상에 이르자, 이명우, 권성 부부는 독약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1920년 12월 20일 새벽 두 시였다. 선생은 유서에 “나라를 잃고 10여 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忠義)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위정척사 세대에게 있어서는 ‘왕권이 곧 국권’으로 이해되었으니 황제의 죽음을 따르는 것이 곧 충의였던 것이다. 부인 권성은 네 통의 한글 유서를 남겼다. 아들 삼형제와 두 며느리에게 남긴 글에는 ‘충의의 길’을 따르는 남편을 따라 가겠다는 간곡함이 담겨 있다. “임금과 신하사이에 의리가 있듯이 부부사이에도 의리가 있으니 자신은 ‘의부(義婦)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