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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정희근(금남면), 김응탁(적량면), 이보순(하동읍), 황학성(하동읍), 김두순(하동읍)이 서명한 후 하동 장터에서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선언서가 선포되면서 하동 지역에서는 만세운동이 모두17회 일어났고, 연인원 1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7명이 사망하고 95명이 부상을 입었고 50명이 투옥되었다. 하동에서 선포된 '대한독립선어'는 2015년에 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로 지정되어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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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만세운동 후 체포되어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아우 박문화도 1919년 4월 7일에 하동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전부법원에서 곤장을 맞는 태형 90도를 받았다. 아들 박성무 역사 전라북도 정읍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34년 9월 17일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는 등 한 집안에서 3인이 옥고를 치렀다. 공은 출옥한 뒤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10월에 상해 임시정부의 법무원 법률판리사, 경상남도찰리사,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법무.군무.재무를 통괄하여 맡은 것으로,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마침내 국권을 회복하자 공은 민족지도자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1947년 7월 5일 68세에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제4묘역 117호에 안장했다. 공은 6남 2녀를를 두었는데, 아들은 성락, 성용, 성완, 성무, 청웅, 성규이고 딸은 성숙, 성남이다. 아우 박문화 역시 1998년에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470호에 안장했다. 박문화는 3남을 두었으며, 성호, 성극, 성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