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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인에게도 사위가 겸전하였으니 그 치가의 요결은 접인의 근후함이 이와같았다. 이로부터 발분하여 오로지 대의로 근본삼아 수양하니 그 인도의 만단경위에 취의하지않음은 발탁한 식견이 투철하여서이다. 30세때 사옥의 소용돌이에서 울부짖다가 4년후에는 하동향교의 직원에 피선되어 유풍을 선양하여 민종정기의 부흥에 심혈을 쏟았고 5년후 기미년만세운동시엔 하동 남해 진주 곤양 사천 함양 거창 단계 진교 등지에 운동자금을 사전에 배정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적의 총검하에서 불굴의 성기를 진작시키고자 극비리에 수입매의 태극기를 제작하고 다량의 막걸리를 비치케하였으며 같은해 파리에서 개최중인 평화회의에 유림대표 137인이 곽면우선생의 영도하에 독립을 청원할때 부친 한재옹도 함께 활동하므로 인하여 교화를 입은 공은 6년후 제2차 유림단 사건시 김심산 창숙에게 오백석의 자금을 임정에 희사하니 이 돈이 2년후 나석주의사가 감행한 동양척식회사의 파과사건으로 직결된다. 1920년 무렵 부산 동래에 산해관을 경영하여 상해임정에 자금을 조달하고 임정요인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는데 이 집은 규모가 웅장하여 한인이 경영한 4대 요정중의 하나였다. 전 국방장관 신성모가 상해 부산간을 내왕하며 독립자금을 전달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백산상회의 안희제사장이 기미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할때 공은 500주를 출자하고 하동사무소의 운영인이 되어 임정에 자금을 도우다가 하동서에 구속되어 고초를 당하였으며 1920년 3월에 인촌 김성수등이 동아일보를 창간한지 6월만에 휴간되고 1년뒤에 속간되었으나 자금난에 처하자 인촌은 고하 송진우와 함께 하동을 방문하고 협력을 구하니 공은 수백원을 흔쾌히 내놓고 동지 9명과 공동취제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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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미년에 임정이 창간한 항일독립신문을 위하여 공은 수많은 토지를 담보하고 자금지원을 감행했던만 곧 세계적인 대공황을 만나 지가와 백미가격의 폭락으로 기한내에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자 채권자인 동양척식회사는 기한 경과를 이유로 담보토지를 빼았아 갔다. 이떄부터 공의 재산은 총3백석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공은 또 이상재의 신간회 설치와 때맞추어 그 지부하에 1927년 하동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민중계몽에 진력하였으니 그 회관은은 지금토록 존치되어 문화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공은 평소에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는 첩경은 후도의 육영에 매였다고 주장하더니 실국 1년전에 부친께서 시작한 현산학교를 공이 운영을 맡아 개조한것이 곧 금일의 김양초등학교이며 1923년엔 진주여고 전신인 일신여고 설립 이사로 참여했고 다시 동래여고 설립에도 간여하였으니 그 의의 소재에 일신을 불원하고 주력함이 이와 같았다. 여기 한 지업은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