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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향리 장시를 기해 3.1만세운동에 수선창의하고 기후 경성 금화 일원에 도래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타가 체포되니 3년간의 옥고를 치루다. 기후 출옥이 낳은 투지는 강인출중하니 지하공작대를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으로 서울 등지에서 운동의 활약성은 고조되다. 일편 고학생 상조회를 결성하니 회장의 책무를 맡아 열과 성을 다했으나 중도 운영난에 봉착하여 곤욕 중 우호어린 형제간의 조원으로 곤학용장의 구호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하동 제헌국회의원의 보좌역을 역임하니 향토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다. 공은 노련기를 맞아 약간에 가사는 기울고 기체는 쇠약하여 장죽을 벗삼아 거동이 불편할 때 주위에서 우의어린 친분들의 해화로 여생을 꾸렸으니 이는 고장의 후한 기풍이 비진 은덕이렸다. 공이 고종 병신년 3월 29일 월운리에서 생하여 계유년 10월 20일 남포리에서 졸하니 향년 68세이며 배위 함창김씨는 병신년생에 임자년 졸로 정결부덕의 내조자이다. 생에 무남 3녀로 계자 병순 손 석기를 두었고 3녀는 전주 최권이 강릉 유태호 진양 강응무에 출가시키다. 공은 효우가중의 3형제로 백형은 중식 우제는 세식이요. 질은 병주 병태 병협 병익이다. 황천에서 공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니 국권 50여년 만에 민국 86년 갑신년(2004) 8월 15일에 서훈이 추서되고 익년 11월 11일에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226호에 합부 후장하다. 영화스레 본 사적비 건립의 후원이 있었기에 하동군청의 지원을 비롯하여 북천면 사무소,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