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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난세진속의 학문과 출세를 도모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은 사는 출가위승에 뜻을 두고 관음사를 찾았다. 당시 본도에는 불교사찰로는 관음사가 유일하였다. 관음사는 기유년(1909년)에 기공하여 불사중이므로 사는 안도월등과 함께 진력하여 불사를 완료하고 제주해협을 건너 육지로 나갔다. 사는 경북 월성군 양북면 기림사에서 자전도하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니 법명은 묵연이었다. 이떄가 1913년 계축4월 8일이였다. 동년 5월 경북 문경군 대승사 강원에서 김혜옹강백하에 내전을 수학하여 수의과를 수료하였다. 한편 한일합방후 일제의 무단통치는 우리민족에게 참을수 없는 고통을 가함으로 처처의 민심은 이민족의 압제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에 사는 경남 연일군 출신인 김연일스님등과 함께 본도로 입도하여 한라산 남록 법정사 도장에 바랑을 내로놓았다. 이곳은 예로부터 피난지로써 전설도시가 전해오는 곳이니 高哉漢山....神守護란 시가 전해져 오는 승지로서 이 지역사람들에게는 큰 의지처였다. 사세는 위급하고 겨레의 통한은 뼈에 사무쳐 조선민중은 갈바를 잃고 헤맸다. 불도는 본시 중생의 편이라 신음하는 동포를 구제하고자 의로운 깃발을 내걸자 법뢰가 서귀포의해를 뒤흔들었다. 3.1독립운동 6개월전인 1918년 10월 5일 본도 좌면도 순리소재 법정사에서 700여명이 봉기하여 중문 왜경주재소와 일제 관헌및 일상인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항일의거를 주도한 사람은 사와 김연일 강창규 김상언등의 스님 12명과 태을교(일명 선도교 전신)의 박주석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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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의 만세와 함성이 고창되자 크게 놀란 왜경들은 기마병을 앞세워 총칼로 맨손의 항일의거대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거대열일부는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포박하고 구금되어있던 13명을 석방했다. 평소 일제 관헌들의 횡포에 분노를 품고있던 민중들은 왜경들을 죽이려고 했으나 스님들이 만류하였다. 봉기군에 붙잡힌 일본상인들이 구타당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들이 간교한 수단으로 조선인의 재물과 논밭을 수탈한것에 비하면 하찮은 일에 불과하였다. 이 항일의거는 이틀간 진행되었으나 결국 일제측의 강력한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된 관련자가 68명이었고 사를 포함하여 일제측이 선고된 33명의 총형량이 46개월이였고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14명이었으며 옥사자가 5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1919년 법정사 승려들이 주도한 이 항일투쟁은 봉기자의 숫자나 체포된 관련자 및 선고형량에 비추어 볼때 단일 독립의거로는 그 어떠한 항일투쟁보다도 돋보이는 항일의거였다. 더 구나 이 항일의거가 3.1운동 6개월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일제하 독립운동 역사상 그 의의를 대단히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것이다. 사는 이로 인하여 일경에 피검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 사는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산망불교를 위하여 법화사복원 서원을 세우고 관음사 대중과 함의하에 스스로 화주를 맡아 노심초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는 39세가 되는 1925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