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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는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박인생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어머니 이학의 아들인 박인생(1903∼1929)은 보통학교 때부터 수재로 알려졌으며 당시 독립운동의 거목인 교사 김문준을 만나면서 애국사상과 국권회복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제주도 유일의 중등학교인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동년 4월에 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에는 졸업예정자 가운데 학업성적이 수석이며 학생자치회의 간부로 지도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남을 설득하는 달변가로 알려졌다. 1926년 3월 졸업하고 11월 3일 장재성과 함께 학생항일비밀결사대인 '성진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던 은사 김문준을 다시 만나 1929년 봄 장재성과의 만남을 주선하던 중 일본 경시청 형사에게 발각되어 연행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부득이 귀향했으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5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1929년 11월 3일 성진회 창립 3주년을 기해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어머니 이학(李鶴)은 아들의 혼이 살아난 것이라고 여겼고 외아들의 떳떳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사후 6년이 지나 성읍 마을에 의연금 1백원을 기증하여 500평 부지에 마을 향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일관헌도 중수하였다. 어머니 이학의 큰 뜻에 감동한 성읍 주민들은 1935년 기념비를 세웠다. 출처 : 고영철의 역사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