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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위리안치되었다. 1875년(고종 12년) 유배가 풀렸으나 선생은 바로 떠나지 아니하고 먼저 귤림서원 터를 찾아 오현 제위께 제사를 올렸다.또 섬을 두루 돌아보며 선현들이 살았던 마을을 방문하여 그 견문을 기록하고 감상한 풍치를 시문으로 표현한 것이 자못 많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그 문집에 빠져있는데 오직 한라산기와 서제 한천공의 유허비문만 실려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서제 한천공은 고려때 예문관 대제학 시중을 지냈으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고려의 중흥을 도모하다가 나라가 망하면서 제주에 내려와 이 마을 가시촌을 설촌하여 집을 짓고 선비를 양성하였다. 서제공은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불사이군의 대의로 지조를 지켰다. 면암 선생께서는 국사를 크게 걱정하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정배가 풀린 후 제주 도처를 살피면서 이 곳 가시촌에 들려 서제공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남다른 감회에 젖었으리라.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을 남기었는데 그 글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유허비문이다. 비록 장구한 세월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위인의 행적과 뜻은 영원히 한결같음을 느낄 수 있다. 선생께서 이 고을에 이르러 글을 지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그 남겨놓은 풍류가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아 후세들의 도학이 이에 의거하여 어둡지 않았고 삼강오륜이 이에 의지하여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뒷날 이 고을에서 나라의 전패를 지킨 일과 고성리에서 일본 불량배들을 물리친 의거 등은 선생의 우국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이리라. 옛 사람들은 현인들이 지나간 곳은 초목도 상하게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그 지은 글이 전해지고 발자취가 남겨진 곳에 서랴. 요즘 크게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