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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연사와 조설대 안내판 옆에 서 있는 면암 최익현의 유배길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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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Myeonam Choi Ik-hyun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조선말기의 역사적 격변을 앞장서서 부딪쳤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올곧은 의병장이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 했던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고,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발행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이 때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거듭 올린다. 이 상소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상소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최익현은 제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제주에 온 최익현은 「주자서」와 「우암집」 등을 즐겨 읽기도 하고, 당시 제주의 대표 유학자였던 이기온과 교류를 하면서 교육활동을 통해 후진양성에 힘쓰다 1년 3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 후 최익현은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이로 인해 결국 고종황제가 강제로 물러나게 되자 일본의 주권 침략에 맞서 의병장으로 앞장서서 항일의병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뜻은 이루지 못하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머나먼 타국 땅인 쓰시마섬으로 마지막 유배를 떠난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절개는 타국에서도 꺾이지 않아 일본군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도 하고, 병에 걸렸을 때 일본 약물은 쓰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병이 악화되어 1906년 11월 쓰시마섬 감방에서 7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