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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殉國志士 趙鳳鎬 紀念碑) 조봉호(趙鳳鎬는 1884年 한림읍(韓林邑) 귀덕리(歸德里) 부농(富農) 조만형(趙萬馨)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19세 때 유학을 떠나 경신(儆新), 숭실학교(崇實學校) 등(等)에서 수학(修學)하여 기독교(基督敎)에 귀의(歸依)한 후(後) 1912年 애월읍(涯月邑) 금성리(錦城里)에 교회(敎會)를 건립(建立)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9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樹立)되자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를 조직(組織)하여 회원(會員) 4,550여명(余名)으로부터 헌금(獻金) 일만(壹萬)원을 모아 하여 상해(上海)로 송금(金送)한 사실이 탄로되어 주동자(主動者) 60여명(余名)이 체포되었다. 그는 동지(同志)들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모든 책임(責任)을 홀로 감당하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복역중(服役中) 1920年 4月 28日 38歲의 나이로 옥사(獄死)하였다. 그는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조국독립(祖國獨立)을 위하여 희생(犧牲)하였으나 유해(遺骸)도 유가족(遺家族)에게 인도(引渡)되지 않았다. 그가 잠든 묘(墓)도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977년 도민(道民)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愛國精神)과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어 기념비(記碑)를 세웠다. 또 정부(政府)에서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을 유가족(遺家族)에게 내리고 순국지사(殉國志士)의 칭호도 허용(許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