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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조정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가안위의 앞날을 내다보고 선생은 초조와 개탄을 가눌 길이 없었다. 고종 1902년 9월 7일 선생이 꿈을 꾸니 왜인이 조야를 점거하자 선생은 동지 23인을 이끌고 죽창으로 도왜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는 평소 선생이 민족을 위하고 구국하겠다는 단심이요 유자의 의리라고 여겨진다.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순국한 민영환의 충혼을 조위하였고 다음해에 면암 최익현이 창의하자 전국의 의사들이 호응하였으나 세불리하여 대마도에 연행되어 절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복국의 웅지를 더욱 굳혔다. 1906년 5월 25일 선생은 독립운동의 전선에 몸을 던지니 24세의 청년이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남겨두고 중국 로서아로 동분서주하면서 독립운동의 선배들과 함께 고난의 길로 나섰다. 황량한 만주의 벌판 눈보라치는 노령에서 고투한 선생의 공로를 어찌 필설로 쉽게 말하겠는가. 그러나 슬프다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지 노령 니콜라이스크의 한사에서 1913년 4월 27일 묘시에 급환으로 서거하니 이 무슨 하늘의 섭리이며 어찌된 인과인가. 이때가 바로 선생의 춘추가 겨우 31세였다.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는 불가의 철리라고 하지만 독립투사인 선생을 추모하는 우리 후학의 마음엔 애공한 원한이 풀릴날이 없으려니 한다. 여기 선생의 높은 정신을 숭모하고 고혼을 달래는 군민 모두의 뜻이 합하여 이를 한 돌에 새겨 수려한 옛 고장에 세우나니 재천의 영혼이시여 향기로운 땅 이곳에 오시여 고이 잠드소서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