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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포교당 서대문 극락암에서 학인을 제접하며 광복의 날을 희구하였다. 선사는 입버릇처럼 삼륜이를 되뇌였다. 그 자의 고문은 유명하야 도산 안창호도 그의 매에 죽어갔는데 비행기 태우기 물먹이기 단근질 손톱뽑기 등이 그의 특유한 수법이었다. 기미년 직후 대선사께서는 만주 길림성과 상해임정에 군자금과 독립군지원금품을 모집하여 보내었으며 이에 다시금 피체되어 삼윤의 고문과 모진 옥고로 인해 반광상태의 폐인이 되었으나 선사의 중심사상은 항상 불타는 조선독립의 의지였다. 고문 때마다 선사는 여러 백번 까무러졌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소생과 독립으로 간주하였다. 실로 모진 고문과 모진 굴욕이었다. 그 참을 수 없는 굴욕 그것은 님을 만나기 위한 고난의 시간이었다. 후일 불교계의 저항운동으로 불청운동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다 대선사의 영향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 없겠다. 기미년 다음해 선사는 단군의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태극기 및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게양하고 대한민단 정부 설립 축하문 및 선언서 포고문을 인쇄하여 장안 가두에 살포하였으며 이천원이라는 거금을 보집하여 상해임정에 보내었다. 그후 상해임정의 신상완이라는 승려와 의용승군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었고 이때도 무서운 고문 끝에 출옥하였다. 결국 선사께서 죽음에 이르는 고문이 오게 되는데 서대문 극락암에 있다가 1938년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낙서사건으로 다시 피체되어 모진 고문 진짜 죽음에 이르는 고문으로 형무소 이감 후부터는 일어나지 못하고 와병상태에서 수형생활을 계속하다가 서대문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청주로 이감하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조국이 광복되기 꼭 1년을 앞두고 1944년 6월 향년 6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옥사를 하였으니 그는 대개 그해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만해가 죽은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불교계의 큰 두 별이 한꺼번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만해는 와석종신하였고 초월선사께서는 옥중에서 순절하신 것이다. 일찌기 항일과 배일의 거성들이 어찌 한둘이리오만은 불교유사 이래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하다가 가신 분들은 유일무이하게 초월대선사가 있을 뿐이다. 어찌 우리 고성 향당의 자과가 아니며 긍지가 아니랴. 선사의 독립운동이 어찌 이정도 뿐이랴. 선사는 그 평생을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져 불태우다가 가신 것이다. 초월대선사 가신 지 근 반세기 나신지 백십유여년에 그의 족카되는 백봉섭이 백방으로 주선하여 건국훈장을 받게되었고 또 향리에 비갈을 세우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불가로신 대강백 예술로는 대서예가 선사의 필적은 웅경고아해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봉원사 등에 그 주련이 남아있다. 이에 명을 지으니 그 명에 하였으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