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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3월 20일 구만면 국천사장에서 거의하였다. 독립선언문은 최정원이 낭독하였으며 공은 공약 3장의 뜻을 부연하였다. 구만에서 출발한 시위행렬은 회화면 배둔에서 동지 김갑록 서찬실 등과 합류하여 민족의 정기를 십분발휘하였다. 일모에 구만으로 돌아온 공은 한인관리 퇴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다음날 각 군면을 비롯한 각 관공서에 이를 발송하였다. 권고문에 이르기를 「그대는 어찌 도이의 노예가 될랴는가! 1일 조속 용퇴하여 민족 반송의 오명을 벗어라」고 하였다. 일찌기 의기상조한 변상태 곽인협 등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동분서주 자리의 따뜻할 겨를이 없었다. 1926년 10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 이상룡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밀휴대하고 고향인 고성에 잠입하였던 윤영백의 심방을 받은 공은 최경진과 더불어 군자금 모집에 전력하다가 고성경찰서에 피검되었다. 경상남도 제3부(경찰국)에 격류되어 갖은 악형을 겪었으나 결코 굽힘이 없었다.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공은 향리에 저연학당을 창설하여 청소년을 모아 국가민족을 위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우렸으나 일경의 간섭으로 1년 유여에 이것마져 폐쇄의 비운을 겪어야 했다. 공은 강직담대하여 신의에 두터웠으며 침중과묵하여 우국의 지성에서 때로 한마디 하는 말이 능히 사람의 폐부를 찔러 듣는 이로 하여 숙연케 하였다. 1968년 5월 25일에 졸하다. 전 배는 함안이씨 진옥의 녀니 녀에 진양인 정영천 선령인 남태길이며 후배에 성산이씨 맹석의 녀니 자에 상구 상복이요 녀에 함안인 이범수다. 상구의 자에 성도요 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