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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론한 나머지 함께 상경하여 서울의 3.1민족의거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문을 깊이 감추고 향리에 내려와 이를 수백매 인쇄하여 은밀히 유포하므로써 인근면의 동지를 규합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 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을 당시 공은 진양군 정촌면 일대의 동지 5000여 명을 규합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군중의 최선봉에 섰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을수 있으라. 공은 이때 진주의 시위군중과 합세하기 위하여 당당히 행진하던 중 왜경과 마주치게 되자 격투를 벌려 2차에 걸쳐 일경의 장검을 빼앗아 남강에 던졌으며 태극기를 탈취하려는 일경의 목덜미를 잡아내던지니 그 용맹을 본 시위군중은 더욱 사기가 충천하였고 독립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아아 그 통쾌함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 그러나 수 부족으로 공은 마침내 일본 헌병대에게 잡히는 바 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3일 후 진주재판소로 송치 도중 포승을 끊고 일경 2명을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린 후 유유히 도주하여 비봉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삼창한 후에 그길로 강원도로 가서 피신하던 중 상해임시정부와 손길이 닿아 김구 주석으로부터 지부장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공은 이토록 이 나라 독립을 위하여 조국의 산하를 은밀히 누비며 갖은 고초를 다 겪었건만 애석토다. 공이 그처럼 꿈에 그리던 조국광복을 불과 6년 앞두고 1939년 1월 28일에 타계하였으니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정부는 공의 유적을 현창하기 위하여 1982년 8월 15일 광복절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내린 바 있거니와 영오면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