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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1940년 임우칠 동지의 하숙집에서 공을 비롯한 박근철 이상만 박응구 이재관 외 10여 명의 동지들이 밀회하여 거사 실행을 위한 계획을 모의하고 공을 단장으로 재일학생단을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활동 중 1942년 2월 경북 예천에서 이상만 외 몇몇 동지들이 밀회하던 차 심부름 아이의 실수로 예천경찰서 한국인 형사 고송이란 자에게 조직문서가 발각되어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던 80여 명의 단원 모두가 왜경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였다. 공은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있다가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동지들 중 가장 많은 형량으로 징역 4년을 수형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절을 맞아 출감되었다. 그러나 일찍 뜻한 바 입신 대망의 큰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일제 치하의 무자비한 고문의 여독과 오랜 수형생활 끝에 체약으로 인하여 1950년 경인 6월 16일 33세의 짧은 향년으로 불행하게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도 무심타 않으리오. 모든 사실 행적은 당시 법원판결문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항일 독립운동 인물록 국가 독립유공자 공훈록 고성 향토수호사 및 고성인의 자랑편 등에 상기되었으며 1990년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 강씨는 진양 강형숙의 녀로 1917년 정사 1월 6일생이며 공과 혼인하여 천신만고의 한 세상을 사시면서도 정숙한 부덕과 인일기백 정신으로 어린 자녀 훈육에 최선을 다하며 문호 유지는 물론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모두 성취시키신 여장부였으며 2005년 음 정월 20일 향년 89세 입 고종하였다. 슬하에는 남 진표 의표와 녀 갑자를 두어 진표는 김녕 김대권의 녀 미옥을 처로 맞아 자 성민과 효민 녀 현정을 두고 의표는 평택 임승택의 녀 순옥을 처로 맞아 자 일민과 현민을 두고 녀 갑자는 진양 강성래와 혼인하여 자 성완을 두었다. 또한 장남 진표는 새마을운동가로서 농협조합장 등 농민운동가로서 지역사회의 충직한 역군으로 새마을동장 협동장을 차남 의표는 이 나라의 중수 언론인으로서 민주화운동의 유공자로서 국민훈장 목란장을 각각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