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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선생의 활동은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울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독립 운동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택한 것이다. 1929년 2월 서대문 형무소 3년간 수감됨. 즐감 후 거제에서 의원을 개설하여 인술을 베풀다가 부산 광안리로 옮겨 대방의원(大邦醫院)을 개업하였다. 선생은 특히 문학에도 천부적 재질이 있어 나라 잃은 슬픔과 꺼지지 않는 민족 혼을 담은 20여 편의 시조를 남기기도 했다. 해방 후 잡지사를 경영하기도 했으며,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중앙정치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선생의 지병이었던 간암으로 1948년 4월 7일 (陰) 49세를 일기로 민족해방 운동가요. 의사요.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했다. 가족으로 항일운동을 함께 한 부인 노유용(盧柔鎔) 아들 태호(泰豪)가 있었지만 한국과 전쟁 이후 그 행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금년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60주년이 되는 해로 그동안 족질(族姪) 길생(吉生)을 중심으로 선생의 애국충정을 선양한 결과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 고장은 선생이 나서 자라신 곳이요. 조국 광복을 위한 불타는 정성을 가꾸시던 곳이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이 성력을 모아 선생 일대의 자취를 간추리고 선생이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 지사(志士)의 뜻이로다. 한조각 붉은 마음이사 백일(白日)이 비치리라〉 2008년 월 일 하청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 김백훈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