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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결성 1910년대에는 국제 정세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신해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이다. 이런 정세 속에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이, 대구에서는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었다. 풍기광복단은 의병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주의 인물들이 중심었다. 다시 1915년 7월 대구에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강경 노선의 인사가 박상진계열의 인사들과 통합하여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광복회는 총사령에 박상진, 부사령에 이진룡이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하지만, 이진룡의 체포로 의형제 김좌진이 그 뒤를 잇게 된다. 광복회는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① 부호의 의연(義捐)및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 ③ 중국.러시아 등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④ 무력이 준비되는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광복회'는 "비밀, 폭동,암살,명령"의 4대 기본 강령을 바탕으로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등의 조직을 확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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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를 비롯하여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천, 서울, 해주및 만주의 봉천과 장춘에 설립한 곡물상과 잡화상을 연락 거점으로 삼아, 친일부호들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광, 세금수송 우편마차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군자금 조달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군자금 출연을 거절하는 친일부호를 본보기로 처단하고 박상진의사 본인의 전 재산을 흔쾌히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렇게 모은 군자금은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만주의 독립군 군자금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상북도와 충청남도, 전라남도와 황해도에서 의열투쟁을 계속해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