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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國志士 金鍾喆先生 功績碑(애국지사 김종철 선생 공적비) 김종철선생은 구한(旧韓)말에서부터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을 살아오셨다. 선생은 1888년 12월 12일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도장곡)에서 부 김영배(金英培)님과 모 영일(迎日)정씨의 2남으로 출생하였고 자는 順一(순일), 본)은 김), 이명은 重吉,(중길)·奎山(규산)·芝山(지산)·春山(춘산)·春花(춘화)·林元學(임원학) 등이다. 선생은 새로운 시대조류를 접할 수 있는 신학문을 배우고자 서울의 徹文(철문)의숙(현: 휘문고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조국의 국권회복을 염두에 두고 국내외의 항일전선을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이후부터 무력항쟁으로 전술을 바꾸어 무기를 구입하고 대구와 신의주에 독립운동 거점을 구축하였고, 1919년 11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났다. 그리고 의용단에 가입하고 독립투쟁을 위한 동지 규합과 무기 구입, 독립자금모집 등 국내활동을 협의하고 12월 귀국하였다. 1920년 선생은 동지 송두환·정두희·최윤동 등과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김봉규·노기용·정래영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선생은 직접 김봉규와 함께 동년 12월 8일 경남 의령의 부호 남정구에게 독립군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남정구의 계략으로 일 경찰에 잡혀 연행되던 중 선생은 일제 경찰 甲斐[가이]순사를 사살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수사망을 피해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다시 상해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1923년 2월 선생은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건설과 부속대표로 참가하였으나, 동년 6월 안창호 등이 속한 임정옹호 파인 改造派(개조파)로 소속을 바꿔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방안 모색, 일체의 고관암살, 주요시설 파괴 및 독립자금모집 등 상해임시정부를 지원 활동하는 상해 청년동맹회가 결성되자, 선생도 합류하여 청년동맹회의 중추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1924년 7월 청년동맹회원인 의원들과 함께 제 안한 독립운동단체 통일운동인 「독립당대표회의안과 법제개 및 정무쇄신 연구조사위원 선정안」이 대표적 의정활동이다. 1924년 8월 상해임시정부 자금조달을 위해 당시 의열단원이고 임시의정원 의원이었던 선생은 동지 장덕진·김문희 등과 함께 중국 支那人(지나인) 도박장을 습격해 자금을 강요하다가 장덕진은 저격되었고 김문희 등은 징역 5년형을 받았으나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피신하여 위기를 면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권회복을 위해서 하나의 통일단체가 되기를 희구한 선생은 김일주·김영호의 주 재로 영남유림의 중진 김창숙과 의열단 간부 양건호·권중환 등과 함께 1927년 9월 한국유일독립당 남경 촉성회를 창립하였다. 당시 선생은 일제경찰이 정한 요 시찰인물(1935년 10월)과 요 수배인물(1936년 7월)로 지목되어 감시와 체포 대상이었으나 겉문과 경찰 수사망을 신출귀몰하게 피하여,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지를 누비며 계속 활약하였다. 선생은 반평생 동안 항일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하여 조국의 자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생사를 모르고 있으나 호적상에는 1941년 3월 10일 사망으로 정리되었다. 국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슬하에 장남 성태, 차남 현태가 있고 손자녀는 영만 외 7인이 있다. 이 동상과 공적 3부는 장손이 주선하여 건립하였다. 선생의 투철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은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김종철지사님의 거룩한 애국애족정신을 마음에 새겨 더욱 부강한 대한민국의 건설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2019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