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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충·효·열의 고을 양산은 신라시대 이래 항일. 호국의 오랜 전통을 이어온 고장이다. 만고충신 삼량주의 박제상은 눌지왕 2년(418) 왜국에 인질로 있던 왕제(王弟) 미사흔(未斯欣)을 구출. 귀국시키고 왜왕의 고문에 의연한 자세로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노라" 하며 충의를 드높여 왜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고려시대 왜구 방어에 큰 공을 세운 양주방어사 김원현(金元鉉). 임진왜란시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조영규(趙英圭) 군수 등의 호국정신은 양산 사람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내리고 있다. 한말 일제는 총칼로 조국 강토를 유린하고 우리말과 성(姓)을 말살하였으니, 식민역사 35년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잊어서는 안 될 절망과 분노의 상흔을 남기고 있다. 1907년 서병희(炳炳熙) 의병장은 일체가 고종황제를 강제퇴위 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의문을 참지 못해 생업을 버리고 서울로 상경. 허위(許蔿) 의병장 휘하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다. 이후 의병 50여명을 인솔하여 경상도 일원을 무대로 일본수비대 · 관공서 일본상인 등을 공격하여 큰 전공을 세우고 결국 일경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양산의 엄주태(嚴柱泰). 전병건 등은 3월 27일 양산장터에서 3천여 군중과 함께 태극기 높이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헌병 경찰의 총칼에 맨손으로 맞서 싸웠다. 4월 1일에도 양산장터에서 2천여 군중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항거하였다. 또한 3월 13일 하북면 신평장터에서도 통도사 승려와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동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춘제(春齊) 김철수(金喆壽)는 일본 동경 2.8 유학생 독립선언서 낭독사건의 선도자로 활약하였으며, 우산(右山) 윤현진(尹顯振)은 상해임시정부 재무차장으로서 사재 및 벽산상회 자금 30만원을 헌납, 어려운 임정의 재정을 도맡아 오다가 애석하게도 약관 30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32년 양산농민조합의거 또한 청사에 빛날 일이다. 당시 일인 대지주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료 과잉징수를 반대하던 농민조합간부가 일경에 구속되자 농민조합장 전병건(全秉健)의 지휘 하에 조합원 300여명이 총궐기하여 양산 경찰서를 습격, 구속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조합원 2명이 현장 에서 총격을 받아 숨지고 200여명은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고에 시달렸다. 1941년 통도중학교의 배일교육 사건으로 김말복(金末福) 선생과 학생들은 일경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학교는 1944년 폐교당하였다. 이외에도 양산 출신 애국지사들은 범어사만세운동, 철원애국단, 대한독립단, 대동단, 흥업단, 노동운동, 군자금지원 등에서 많은 활약을 하다가 투옥되거나 순국하였다. 오늘 양산시민의 정성을 모아 선열의 얼을 기리는 높고 거룩한 기념탑을 여기 세운다. 지금 세계 속에 우뚝 선 조국. 웅비하는 양산의 발전상도 이 모두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한 애국선열들이 흘린 피의 대가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양산의 형제자매여! 옷깃을 여미고 그날의 선열들이 펼친 고귀한 희생을 가슴에 새기며 명복을 빌자. 님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2009년 3월 1일 솔뫼 최해군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