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age


17page

김상태 의병장의 휘는 상호, 자는 경육, 호는 백우이다. 본관은 삼청으로 실직군왕 위홍의 27세손으로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나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뚜렷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을미사변때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반포되자 그 다음해인 1896년 영월에서 의암 유인식에 의해 결성된 호좌의병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에서 유인석 선생으로부터 춘추대의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송, 임강, 백두산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정미칠조약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한채 이강년과 함께 정미의병에 참여하였다. 호좌창의군의 중군장을 맡은 그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영월 덕포전투, 영춘 서벽전투, 문경 갈평전투, 영주 죽령전투 등에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908년 이강년의병장이 제천 작성전투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자 그 뒤를 이어 호좌대장군이 되어 의병들을 지휘하였다. 장군은 호좌의병을 이끌고 태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왜적을 격퇴시키기 위한 격고문을 발표했으며, 영월, 영춘, 순흥, 문경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상태 의병장은 밀정의 신고로 1911년 경북 순흥군 석천포에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의 행동은 당당했으며 또한 죽음을 예사로이 여겨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한지 13일만에 순절하니 춘추 50세였다. 장군의 시신은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부인은 경주 손씨로 혼인후 은거생활을 계속하여 파란 많은 세월을 보내다 1924년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 서림산에 안치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삼척김씨 종친회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김상태 의병장의 높은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종친의 뜻을 모아 비를 건립하다. 서기 1998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