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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서 남부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선생은 1907년 8월 19일 영월 주천에서 연합 의병부대를 창설하기로 합의하고 옛 동료 이강년을 호좌의진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전군장이 되어 9월 7일 문경 갈평전투에, 10월 22일 원주 신림 싸리재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정미년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07년 11월 19일 강릉으로 진격한 선생은 연곡 가평에서 부대원 220명을 이끌고 일본군 강릉 수비대와 대치하여 치열한 접전 중 일본군의 집중사격으로 부상을 입고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자진하여 53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여 대일항전을 종식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의병들의 진중장례로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명마산에 안장되었고, 정부의 일제의 국권침탈에 당당하게 맞서 결사 항전을 전개한 숭고한 공적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민족자존을 위한 충정과 그 뜻을 되새기고 국권수호를 위한 큰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영월군민과 영월문화원은 이 공적비를 세운다. 2023년 11월 19일 영월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