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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부 총관을 역임하였고 또 임시정부가 통합된 후에 국내 실태조사원의 명을 받아 귀국하여 그 의무를 수행하다가 경북 의성에서 피검되어 사형이 확정 형장으로 가는 도중 일인 통역자와 두 동생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다시 상해로 갔다. 1927년 3월에 신숙과 함께 독립촉성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만 대표자회의를 길림에서 소집 북만대표로 참석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광복을 두 해 앞둔 1943년 6월 11일에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니 향년 63세이다. 의열공은 1889년 기축 정월 21일에 나셨다. 호는 하산이고 세진은 이명이다. 1912년 24세때 백형 의연공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1913년 10월 통화현 하서강에서 허혁 등과 부민단을 조직하고 중앙검찰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17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22년 통화현의 김만수 등과 자치회를 조직 일경과 싸우다가 유기동 김만수는 전사하였다. 공은 빈강현팔구에서 빈강정미소와 조길밀하에 농장을 경영하면서 동원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군관 양성 및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30년 11월 17일 일인 밀정에게 피살 순국하시니 향년 41세이다. 의훈공은 1895년 을미 10월 22일에 나셨다. 호는 호산이고 명진은 이명이다. 공은 두 형의 망명 이듬해 만주 항인현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통의부 제4중대원에 배속되어 활약했으며 1923년 화순계 옹호단에 입단하고 서로군정서 헌병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독립군 결사대원 50여명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했으며 1931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34년 승덕가에서 중국인과 동풍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낙양군관학교 생도 모집차 지청천 오광선 등이 밀파한 황인 직금기대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1945년에 광복군 국내 지대 선언부장 및 경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광복 동지들과 대종교에 관여하하면서 민족정기 고양에 진력하였다. 1983년 6월 19일 서거하시니 향년 88세이다. 의연공의 배위는 영양남씨인데 4남 2녀를 두었고 의열공의 배위는 영해신씨인데 1남 2녀를 두었고 의훈공의 배위는 김해김씨인데 1남 2녀를 두었다. 1990년에 정부로부터 3형제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정된 돌에 공들의 혁혁한 사적을 소상히 밝히기는 어려웠다. 대강을 간추려 적고 명을 붙인다. 한 집 3형제가 조국광복에 몸을 던져 이역만리 만주 땅에서 안일이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