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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인산 때 동지들과 함께 백립소복으로 만장을 앞세워 북향배례하며 통곡했고 궐기일을 기미년 3월 25일 영양장날로 정하고 종질 인암 휘 유승으로 하여금 군중을 동원케하고 전향에 통문하야 당일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뿌리고 일제 침략을 규탄하니 수많은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에 놀란 왜군경은 평화적인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167명을 연행하여 금융조합 창고에 가두고 선셍의 조카 달승 재승을 구속하고 가택수색으로 약산 헌무집도 압수해갔다. 잔혹한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을 지고 동지들을 석방케하고 불법침략과 조국독립을 주장하니 통역을 하던 당시 한국인 군수도 가책을 느껴 사임했다고 한다. 2년 6개월간 안동 대구 서울 형무소에서 북역중 망국의 한이 서린 음설록을 찬했고 옥후에도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했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에 참여했고 치안유지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심산 김창숙과 교유하며 성균관에 간여하고 향교 전교와 도산서원 유사로 활약하면서 명지서당을 열어 후학을 지도했다. 그러나 오랜 투쟁과 옥고의 여독으로 단기 4284년 8월 8일 6.25동란의 골육상잔을 탄하며 영면하시니 향년 76세다.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4323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부인 진성이씨는 퇴계 선생 후예로 인고의 세월 속에도 선생을 내조하고 자녀 남매를 잘 길러 여는 한양인 조인기에게 출가한 효부요 현모양처였다. 자 효승은 선대의 학문을 이어받은 유학자로 향교 전교와 민선면장을 지냈고 자부 전주유씨도 효부로 선생을 지성껏 섬겼다. 손자 변원은 평생을 교육에 헌신하면서 선생의 현양사업에 힘쓰고 있고 용원은 사업가로 해외에 진출했다. 증손 식창은 고등학교 교사요. 도창은 공학박사며 현손 정민 정우는 아직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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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선생이 가신 지 반세기라. 장손 혁원이 조부의 행장을 정리하여 수갈을 위해 명을 청하니 나 또한 선생의 방외손이라 어릴 때 뵜던 상투에 관을 쓴 근엄한 모습이 떠올라 사양치 않고 옷깃을 여며 이에 명하노니 왜적이 침노하니 읽던 책 팽겨치고 내가 나서 쫓으리. 앞장서 싸우셨네. 불법침략 규탄하고 광복을 외치는데 그 누가 당해내랴. 총칼도 무색했다. 한 평생 겪은 고통이 명의 거름되어 팔수곡 굽이굽이 푸른 숲 무성쿠나. 청구벌 굽어보며 이 땅에 잠드셔도 높은 뜻 그 광채는 겨레의 등불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