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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공이 적래도하자 대장추대하며 창의간청을 거듭함에 공이 사양과 충간으로 효유하여 왈, 거병과 창의는 선후가 유하고, 차제창의는 필연이라. 급선무는 현 5면의 미참자불소하니, 미참자는 충과 역으로 경계될 것이며, 의를 모르는 짐승과 사람으로 대별될 것이라 천명하여 집회를 촉구 1면 대장은 향내 원로 추대가 마땅함을 역설, 중심성성으로 원만집회 후 침성지선생을 천거하여 한말 병제에 따라 각임배치하여 서효원공은 의영도지휘사를 수임하고 서효신공은 우익장으로 서효격공은 서기로 서효달공은 의병으로 군량과 자금은 문배하고, 병자 2월 초 3일 용○천 백소장에 장군기를 세우고 병정훈련시작하니 청송의병창의일이요! 거병창의를 고유함에 효원공이 축문자작 왈, 500년 문물이 탕실되고 만백성이 망연자실 울부짖으니 진충보국충성으로 창의를 방성하고 원수를 가려 적을 토벌함은 오추에 부끄럽지 않으니 종사에 회태할 기회 있어 정성과 통곡으로 고하여 신의 가호를 기원고유하고, 수등단 명문의 결연한 서사를 선창하여 거병함에 선후 차례 가려 주밀 신중 창의를 주도하니 우익장 효신공은 창의전 견집불허로 무기고를 사수하고 효격공은 서기로 적원일기를 기록 후 세보전에 공헌하고 효달공은 의병으로 진력하였다. 4월 초 2일 감은 후록에 적병 첫 출몰 접전에 포병 60명으로 이천의성진과 합세 청송진이 최전방에서 방포여뢰하고 비환여우한데 적 7, 8명을 사살 격퇴 패주시켜 서전 대승 사기충천하니 영덕진에서 원군청에 응하여 승전을 위무받았다. 4월 12일 성상의 의진 해산 칙유에 따라 각면 분진 방비 중 화장에서 적출몰 급보에 청운유진에서 출진행 군마평 후산 화전등에서 배식 중 적의 기습으로 치열 백병전에 세궁역진하여 아진 의병 6명이 장렬 전사하고 부지기수 사상 부득 후일 기약 해산 각자 입산 혹은 민가 피신함에 효원공은 주왕산 산사에 은거 피신 중 후유발병 귀가하여 익년 정유 8월 초 6일 타계하니 오호라! 청사에 빛날 사초가 일정하에 후손의 우매로 인멸되었다가 거사 100주 광복 51년 차에 진중적원일기 원본이 세상에 소명되어, 병자년 8월 14일 광복절에 4의사께 건국공로포장이 추서되니, 선열의 우국애향사인정신은 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