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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로서 명성이 향당에 자자하였으며 모친은 연안이씨 광지의 따님이다.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착하고 슬기로와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18세까지 어른 밑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23세에 금성 영신 학교를 수료하여 신학문을 닦게 되었다. 이어 계성 중학교에서 3년 수학하고 성경 학교에서 다시 3년 동안 공부하여 1919년에 경북 노희 조사로 임명되었다. 그 해 이른 봄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3.1 의거의 횃불이 타오름을 목격하고 의분을 참지 못해 곧바로 대구로 내려왔다. 3월 7일 밤 모교 성경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의거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여 그들의 뜻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이튿날 8일 오후 3시에 성경 학교 학생 20여 명과 함께 시위 대열에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어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왜의 경찰에 잡히어 온갖 고초를 이겨 내며 1년 반의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7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경북 노회 목사가 되었다. 신녕 청송 대구의 동인 중부 등 각 교회에서 교인들과 이웃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일깨워 주었다. 예수 사랑의 길이 곧 겨레 사랑이라는 신념으로 조용히 그 뜻을 실천하였다.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끝내 굽히지 않고 신앙의 양심과 겨레의 얼을 지키었다. 1935년 경북 노회 노회장과 전국 총회 부총회장에 추대되었으니 종교계에서 공의 고매한 인품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1962년 양력 3월 27일 대구 대명동에서 소천되니 향년이 73세다. 1906년 여주이씨 병선의 따님 옥계와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둘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은 명식 은식이며 손자는 동렬 성렬 형렬이고 맏딸 순옥은 경주인 이근수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 순남은 밀양인 박태진에게 시집갔으니 외손이 3명이다. 1992년 3월 1일 나라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그 나라 사랑이 뜻과 공적을 기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