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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향교. 향교는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성립되기 이전에 지방에 설립된 국립 교육기관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문화를 선도하는 거점이었다. 나주향교는 전국 향교중 최대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한국향교역사와 건축을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나주향교는 987년(고려 성종 6) 8월 전국에서 12목(牧)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어 1398년(조선 태조 7)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고 1893년(헌종 5과 1873(고종 10)에 크게 중수하였으며, 근래에 발굴조사를 거쳐 동재와 서재를 원래 규모대로 복원하고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나주향교 건물배치는 서울 문묘(文廟)와 같은 형식인 전묘후학(前廟後學, 앞에 제사 공간, 뒤에 학습 공간을 둔 배치형태)이다. 대성전(보물 제394호)은 규모가 웅장하고 양식과 격식이 뛰어나 서울 성균관을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고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나주향교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480년(성종 11) 교상 10인이 동시에 과거 생진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당시 교수로 있던 오한 박성건이 금성별곡을 지어 축하하였으며,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또한, 충복사유허비가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당시 대성전의 수복이었던 김애남이 성묘 위패를 안전하게 금성산으로 옮기는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손들을 복호시키고 사우를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1922년 충복사가 없어지사 1924년 2월 유허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아주향교는 전통문화를 올바로 전승하고 향교를 21세기에 맞는 강학공간으로 만드는데 힘쓰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는 석전대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