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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이을호선생 묘비명 현암 선생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2000년 5월 문인 오종일교수가 행장을 비롯한 글을 가지고와서 내게 묘비명을 부탁했다. 이때 나는 후미진 시골에 내려와 있는 보잘것없는 몸이었다. 지위나 명예 어느 모로 보나 선생의 뛰어난 면모를 높이 펼치기에는 부족해서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에 선생의 뜻과 행적을 서술하여 후세에 남긴다. 선생의 휘는 을호 호는 현암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고려말 충절문하시중 완풍대군 휘 원계의 후예다. 완풍대군의 둘째 아드님은 휘 천후인데, 탁월한 용맹함으로 어렸을 적부터 숙부인 성계를 시종하면서 몸을 던져 보위하고 창과 화살을 피하지 않았다. 조선을 개국할 즈음에 태조가 문을 닫고 거절했지만, 오직 공만이 방에 들어가 부축하고 나와 나아가 왕위에 오르도록 권유했다. 개국공신에 녹훈되었고 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도이니, 이분이 선생의 21대조다. 양도공의 아들 여양군 휘 광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정부인 김씨는 어린 네 아들을 데리고 담양으로 내려왔다. 여양군의 셋째는 월산군 휘 경인이고 월산군의 아들 통더강을 지낸 휘 효지다. 통덕랑의 셋째는 현감을 지낸 휘 세문이고, 현감의 셋째인 휘 영석은 덕을 감구초 벼슬을 살지 않고서 무장으로 옮겨 터를 잡았는데, 이로부터 영광에 세거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 정흠이요, 증조는 휘 순삼이며, 할아버지는 휘 흥란으로 모두 문행이 있어 대대로 무장서원의 내임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갑영,1884`1912)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만나 옛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좇았으며, 인근의 김성수, 송진우등과 함께 교우를 다지며 광우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영광 사회를 일깨우고 이끌었다. 어머니인 창녕조씨는 사인 찬승의 따님으로 영덕과 정절을 갖추었다. 1910년 10월 15일 선생은 영광읍의 향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갖춰 넓은 이마와 다부진 입, 빛나는 눈과 큰 귀에 정신이 총명해서 보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기며, 장차 크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불행하게도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는 바람에 선생은 오대독자가 되었고, 아버지 없는 외로운 신세로 모자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운명이 되었으나, 모부인이 자식을 훈도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일찍부터 향숙에 들어가 사서를 외우고 읽었다. 여러 방면으로 비용을 마련해서 경사로 보내, 2년 기한의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졸업하는 해 위독한 병에 걸려 거의 생명이 꺼져 갈 무렵 천운으로 명의로 이름난 해초 최승달선생을 만났고, 아울러 문인이 되어 '동의수세보원'과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배웠다. 선생은 사상의학을 윤리의학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사상의학을 깊이 탐구하려면 반드시 역을 먼저 탐구해야하고, 결국에는 동양철학에 근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경성의전에 전학해서 널리 동서양의 약리를 섭렵했다. 약제사의 자격을 취득했고, 고향에 돌아와 호연당약방을 열었다. 이 당시에 한의학자인 장기무씨는 조선일보에 글을 실어 한의학을 부흥시키고, 학회를 조직해야 하며, 연구소를 설립하고 학회지를 발간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양의학자인 정근양씨는 장씨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서양의학은 과학으로 한의학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먼저 서양의학을 부흥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로 인해 논앶이 일어났는데 선생은 두 의론을 조정하면서 종합의학을 수립할 것을 전제로 한의학을 부흥시켜 서양의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자는 견해에 찬성을 포하면서 한의학의 존재가치를 긍정했다. 선생이 글을 발펴한ㄴ것은 14회에 불과했지만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인정을 받았고, 조헌영이 주간하는 '동양의학'의 창간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24세로서 주변의 선생과 유지들로부터 청출어람의 신예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YMCA에서 정말체조및 시국의 변화와 당세의 실무에 대해 들었고, 귀향해서 배운것 것과 뜻한 것을 함껏 실천했다. 밖으로는 체육활동을 보급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갑술구락부라는 조기모임을 조직해서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 장거를 축하한다는 핑계로 군민들을 모아 달리기 대회를 개최하면서 은밀히 전단을 뿌리고, 군중들의 마음을 격발시켜 큰 소리로 독립을 부르짖고 만세를 외쳤다. 당시에 이를 체육단사선이라 불렀는데, 만세 사건의 비밀물건에 의하면 선생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결국 1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게되었다. 옥에 갇힌 동안에 되풀이해서 경서를 읽었고, 일본 유학중인 정종이 보내 준 서양철학 서적을 널리 섭렵했다. 제법 철학적 소양과 방법론을 갖춘 뒤인 1935년 다산선생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여유당전서'및 한학의 원전 자료들이 간행되었고, 비로소 조선학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당시의 지식들이 조선학 연구의 학풍을 조성했는데 선생 또한 이런 영향을 받아 한국 유학 사상을 정리하고, 스스로 한국철학의 길을 개척했다. 선생의 철학적 기초는 곧 옥중에서 괴로움을 참아 가며 독서하고 사색하는 와중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선생의 뜻과 사업은 약학과 현실로부터 철학과 교육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복후에는 지기의 정종선생과 영광중학을 세웠으니 결국 민족 혜명의 존망을 깨닫고서 앉아서 담로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교장을 맡고나서 한편으로는 학문을 쌓고 다른 일면으로는 인재를 길렀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좌익과 우익이 나뉘고 이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좌익과 우익 모두선생을 데려다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므로 선생은 처신의 어려움속에서 학교의 일을 그만두도록 독촉을 당했기에 영광을 떠나 광주로 옮겨 광주의전의 약국장을 맡았다. 약학사및 '동의수세보원'과 사상의학을 강의하면서 동서 의약의 회통을 도모했고 동양철학을 깊이 탐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로 피난을 가서 문인 조희관을 만나 잠시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고, 강수은의 '간양록'을 출판했고, 논어, 맹자를 번역 풀이하면서 경전의 대의를 깊이 터득했다. 문화 정신을 창조 진전시키고 학술사상을 개척하고 밝혀서 학계가 점전 선생의 철학의 수준과 성과를 알게되었다 1955년 전남대학교 철학과의 특별 초빙을 받아 동양철학 강의를 담당하게되자 '대학공의'와 '중용자잠'을 강의했다. 처음으로 '유불 상교의 면에서 본 정다산'이란 논물을 저술했는데, 이 논문이 '백성욱 박사 회갑 기념논문집'에 실렸고, 연세대학교 총장 백낙준박사가 가장 뛰어난 논문으로 선발해서 상금으로 연구비 500달러를 주었으며, '다산경학사상연구'로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글은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한국학총서' 제19집에 선정 수록되었다. 이로부터 학계에서 모두 선생을 다산학의 전문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전남대 출판부장, 도서관장, 박물관장, 호남문화연구소장, 문리대학장등의 직책을 차례로 맡으면서 한국문화의 예술활동에 참여했고, 호남지방의 문헌과 자료를 수집해서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다산학에 대한 연구도 그치지 않아서 한국사상과 문화를 널리 연구했고,한국유학의 특성을 힘주어 설파했다. 1975년 정년퇴직하면서 '실학논총'을 편집 간행했다. 선생은 정년퇴직 이후 1978년부터 11년 동안 광주박물관장을 지내면서 호남전통문화를 천명 발휘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강진의 다산 유적을 복원했고, '다산학보'를 창간했으며, 다산연구원을 설립 지속하면서, 과거에 생각했고, 썻던 글을 아울러 사회활동에서 얻은 실제 경험에 투사해서 거듭 새롭게 하고, 고쳐 나갔으니, 선생의 학술적 탐구 노력과 입론의 엄밀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박물관장으로 있을 때는 동호회를 조직하고, 강좌를 개설했으며, 고적을 답샇고 고고학을 널리 대중화했다. 박물관을 떠난 후에도 건강이 여전히 좋아 다신계를 조직하고, 사회 정화운동을 추진했다. 1993년 대주재단의 도음으로 '다산의 역학'을 저술하는 데 힘썼고, 이 책으로 열암학술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나이가 85세였다. 수상 소감에서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 학문의 방향이 시작되었음을 알겠다'고 해서 듣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선생은 나이가 많을수록 덕이 높았고 세상을 구하려는 마음도 더욱 도타웠다. 자연에 감사하면서 인생을 가엾게 여겼고, 몸소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운동과 상록 생명운동에 참여해서 광록회에서는 선생을 높여서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이것은 선생이 만년에 우주를 관찰하고 느끼고 인생을 몸소 체험하고서 심오한 사색과 그윽한 명상을 통해 외광반조하신 경지에서 '자연과 인생이 둘이 아니다'는 시적인 마음을 토로하신 것이다. 임종을 맞이하기 며칠 전에도 펜을 놓지 않았고, 애써 일어나 '한국실학자생론'을 저술하셨으니 '한 숨이라도 남아 있다면 조금도 게으르지 않는' 생명의 힘이라 할 것이다. 선생은 완인이었던 것인가! 선생의 부인은 창년조씨이고, 2난 4녀를 낳아 길렀다. 큰아들 원태의 부인은 김정화, 둘째아들 성윤의 부인은 유지진이요, 큰딸 진선의 남편은 전창훈, 둘째 딸 현영의 남편은 차용석, 셋째 딸 정미의 남편은 한윤호, 넷째 딸 여란의 남편은 홍윤표이다. 맏손자 정헌의 부인은 황수진이고, 그 밖의 손라로 정준, 정석, 정핑이 있고, 증손자는 기은이다. 부인 조씨는 1982년 11월 13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88년 3월 13일 광주의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나, 영광군 불갑면 봉동 뒷산 유좌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이에 아래와 같이 명문을 짓는다. 영물의 들고 남에 정해진 운명있어 오대독자로 세살에 아버지 여의었네. 하늘이 큰일 맡기길 제 먼저 심지 괴롭히니 위중한 병 딛고 일어나 옥에서도 형설의 공 닦았어라. 동서 의학 논쟁할 때 중도로서 보화했고 약을 짓고 매울 모아 학교 세워 인재 키웠네. 유불 서로 사귀었다고 다산을 제게했고 많은 글은 책을 이뤄 사림이 우뚝했네. 글과 생각 분발했고 찬술 계속 이어져 수사 근원 거술러서 실학으로 돌이켰네. 감춰진 것 드러내서 혜명 밝게 되살리고 근본을 학립해서 한국철학 널리 밝히었지. 세상 구하겠단 의지 늙을수록 도타웠고 마음은 신명에 머물고 인정은 산하를 채웠데. 마음은 깨끗이 비우고 서책 중에 삶을 마쳤으니 장수는 천명이요, 남긴 덕은 영원하리 2000년 경진 입추일에 중천 김충렬은 짓고 쓰다. 출처 : 현암이을호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