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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고인후공은 조선 명종 16년 서기1561년 생하여 선조25년 서기 1592년 순절시까지 그 무렵인 16세기에는 우리나리에 뛰어난 명인이 많이 살아 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같은 대전란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해도 명인들의 노력으로 나라를 부지하고 발전시킬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력량을 조직하는 제도는 갖추지못하여 명인들의 정성만큼 정치나 사회가 받랄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만해도 4월 14일 동래에 상륙한 왜병이 5월 3일에는 서울을 침범하고 6월 13일에는 평양을 침략한것처럼 단시일에 온 나라를 짓밟아도 그를 당장에 쫒아내지 못하였다. 온 나라가 전쟁을 만났는데 군국기무를 총괄할 기구는 없었고 무기나 군량미도 준비되어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몽진길에 오른 선조임금이 5월 1일 임진강을 건널때 내가 어디로 가는것이냐고 울며 소리쳤다는 것이다. 그 소문은 전국에 퍼져 곳곳에서 충신열사들의 의병이 봉기하였다. 호남광주에서 재봉 고경명과 종재 김천익이 먼저 일어나고 ??에서 어촌 김한과 중봉 조헌, 영남 고령에서 망우당 곽재우, 춘창에서 약산당 조광의, 안동에서 근시재 금문, 경주에서 잠부 최운입등이 앞다투어 봉기하여 왜적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속전속결로 침략하던 왜병이 북침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때에 도관찰사 유성용이 평양의 왜병이 압록강을 건너면 조선을 버리는것이라고 단호히 반대했다. 그리고 무호남이던 무국이니 호남이 건재하던 ?정이 확보되고 의병이 일어날것이므로 희망을 갖자고 외쳤다. 그래서 호남에서 발병한 고제봉, 준봉, 학봉 삼부자의병이 행재가인 의주를 향해 북상하다가 금산에서 왜병을 만나 격전을 폈던것이다. 처음에는 삼부자가 항전했으나 나중에는 준봉공이 거병하러 지방으로 가고 재봉, 학봉 부자 의병이 대적하였다. 5월에 왜병이 금산에 당도하자 의병진에서 800기병이 출동하여 왜병을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