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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본관은 김해이며 수로왕의 68대손이고 자는 경태 호는 락포이시다. 서기1879년 을유 3월 9일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 용두리 학동에서 부 휘 노주 3남으로 출생하셨다. 유년기는 향리서재에서 수학하셨고 성년기는 송사 기우만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결사구국할 결의하에 동지규합에 힘쓰던중 서기 1913년 계해 풍기에서 채기중 유창순등 수십명과 비밀리에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광복운동에 열중하던중 대구에서 박상진 권영만등 다수 동지와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칭하였다. 서기 1916년 병진 노백린 김좌진 한훈등 수십동지가 본회에 가담하여 다시 광복단이라 개칭하였고 이후 단원이 수백명으로 증원되어 단세는 더욱 신장되었다. 이에 혈맹하여 "오등은 대한독립국권을 광복하기 위하여 사로서 결의하고 구적 일본을 완전 구축하기로 천지신명에 서함" 이란 선언문을 작성하고 조국에 세고하였다. 광복활동은 국내외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하고 노백린은 동지 수십인과 함께 중국 상해등지로 김좌진 박성태등은 일부 동지들과 중국 삼동성으로 떠났다. 단의 활동은 점차 활발히 진해되었고 정사년부터는 을미년 사이에는 일제와 내통하던 악질 부호들을 주살하기로 하였다. 이에 당황인 일제는 단원 40여명을 체포하여 채기중 박상진등 7명은 사형에 유창순 권상석등 25명은 무기 또는 장기형에 처하였다. 이때 체포망을 빠져나온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남경등지에 유연하면서 중국의 정계요인인 손문 당소의 호한민등 제인사와 대한민국독립 방략을 담론하면서 남경에 있는 중신 손문의 저택에서 다음과 같은 시국시를 남기시기도 하셨다. 樂浦金弘斗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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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하시던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광복단 대표로 파유된 한훈 일행과 상봉하여 임시정부의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김구 등과 국내 활동 강화를 위한 방안을 협의하고 봉총 등 다량의 무기를 가지고 한훈 일행과 같이 귀국한 다음 이 곳 학동을 근거지로 하여 군자금 모집과 국내 각지의 청년회와의 연대 강화를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의 통신 기관 설치를 위한 활동을 하시던 중 1920년 8월 9일 나주경찰서 고등판사대에게 피체되어 광주로 압송되시었다. 선생은 극악한 고문에 항거하여 2회에 걸처 단설하고 무언의 항쟁으로 광복단의 기밀을 유지함으로써 동지의 신변을 보호하는 충절을 지키시어 단과 자신의 활동 범위노출을 극소화하여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동지 안재학 이기송 김동환 기산도 등과 같은 감방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선생은 악형의 여독으로 서기 1933년 계유 6월 9일 55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높이 추앙하고 1977년 12월 13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여기 송학산록에 모셨다가 서기 1992년 7월 10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천장되였다. 서기 1992년 7월 8일 완산후인 이기전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