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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는 승주요 자는 공무이며 호는 경당으로 평택임씨 충정공 휘 언수의 20세손이시다. 부친 임노직께서 파평윤씨와 결혼하여 무육조졸하니 김해김씨와 재혼하여 서기 1867년 12월 23일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576번지에서 장자로 출생하시다. 유시부터 부친에게 수학. 20세에 관계에 뜻을 두고 서울에 체류하면서 학문탐구에 진력하시었으며 성품이 온화하시고 대의와 사리에 밝으셨으니 복암 이설 지산 김복한 두 영공께서도 사론이 있으면 항상 논의하셨고 지우들과도 친교가 두터웠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김복한과 안병찬이 상소문과 격문을 각지방에 전달하여 유림과 민중을 봉기시키고 홍주목사 이승우를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12월 3일 드디어 관하 17개군에 통문을 보내 소모케 하였다. 공은 당일로 화성에서 안병찬 채광묵 선생과 180여명을 인솔 홍주성에 입성하였으나 다음날 이승우의 배반으로 김복한 이설 두 영공이 구금되고 따라서 공을 비롯하여 주모자 총 23명이 구속되니 국권회복을 위한 을미의거 봉기는 미성에 그치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평생을 통한 지사의 서물여기하신 후덕과 충성심의 보답으로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공은 16세에 재덕이 겸전하신 풍양조씨와 결혼 2남3녀를 두시니 장자 경호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지사요 차자 성호는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였으며 손으로는 한흥 한청 한승 한응 한수를 두시다. 국운이 비색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1939년 2월 24일 73세로 화성면 수정리 615번지에서 서거하시니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한 평생을 마치셨다. 형제와 부자 한가족이 왜적에 항거 국권수호를 위한 애국정신이야말로 영원불멸 천추에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