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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인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조약을 맺으려 할 때, 곽종석은 보호조약을 거부하고 국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가는 도중에 제2차 한일조약 체결의 소식을 듣자 바로 조약을 맺은 적신(賊臣)들을 처단하고 천하의 공법에 호소해야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임금과의 만남을 요청했지만, 불발되자 거창 다전으로 돌아갔다. 61세인 1906년에 면암 최익현의 의병 제의를 사양한다. 면우는 '우선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입작을 지켰는데, 이런 태도는 외세와 맞서는 방식인, 기의(起義), 망명, 자정(自靖) 가운데 자정론에 속한다. 65세인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자 통곡하며 며칠간 식사를 끊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도연명과 남송 김길부 두 사람의 성으리 따와 "도(鋾)"를 이름으로 삼고, 그들의 자(字)에서 한 글자씩을 가져와 자(字)를 연길(淵吉)이라 했다. 특히 한일합방 후에는 의병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고, 해외망명 권유도 거절하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서 자처하면서 한반도 안에 머물렀다. 유교학회 참여 요청과 성균관을 개편한 경학원(經學院)의 제주(祭酒) 제의도 뿌리치면서 어떤 조직과도 거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