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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이월면 노은실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이월국민학교 전신인 사립 보명학당을 설립하였고 그 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경술국치(1910)로 조국이 비운을 맞게 됨에 비분강개하여 이듬해 신유년에 만조로 망명하였다. 시베리아 북경 상해를 전전하면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이지영 조소앙 조성환지사 만나 구국의 방략을 손하다가 대동청년당의 일원으로 신백우 서세충 지사의 파리강화회담에 파견되었다. 장군의 항일 투쟁은 곳곳마다 선봉이었고 활약상은 항상 뛰어났으니 서로군정서와 신흥부관학교의 교관 역임은 물론이요 대한통의부의 의용군사령장과 군사원장을 겸임하였다. 대소 수십차의 전투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전과가 혁혁하니 세상에는 장군을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의 삼천(3天)이라 불렀다. 그러던중 갑자년(1924) 6월 1일 봉천성 흥경현 이도구에서 사관들의 야외조련을 지휘하다가 홀연히 마적으로 가장한 왜적의 습격을 받고 순국하니 향년 42세였다. 초배 광산 김씨는 20대에 졸했고 후배 풍천 임수명여사는 독립군의 뒷바라지에 진력하다 출산을 위해 귀국하여 한성 사직동에 거주하던중 장군의 순국비보를 듣고 갑자(1924) 10월 4일 유복녀 계영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장군의 장남 현충은 중국 산서성 북방군관학교 재학중 독립군에 종군하다가 경오(1930) 7월 7일 비분하여 자결하였고 차남 현철은 경신년(1980) 3월 16일에 졸했고 3남 현택은 생존하고 있다. 장군의 손으로는 현충의 계자 범호와 현철의 자 제영과 현택의 자 지여과 윤이 있다. 장군이 순국하신지 70성상만에 친히 육영의 꿈을 심던 이 장소에 오정환을 위시한 유지가 장군의 위대한 삶을 길이 추모하고 자 이 비를 세우다. 계유년(서기 199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