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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철훈(閔喆薰) ~1895.05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충북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891년 일제는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면서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시켜갔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개입으로 말미암아 국제정세가 변화하면서 친일세력이 약화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급기야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일제는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양반 유생 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분연히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은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철훈은 원래 기개있는 선비로서 국모시해 이후 복수보형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되자, 이듬해 1896년 초 유인석 의진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인석 의진에서 여러전투에 참가하다가 제천에 회집하여 있었는데, 남한산성 의진을 함락시킨 참령 장기렴의 관군들이 일본군과 함께 제천으로 이동하여 4월 23일 가흥에 도착하였다. 이후 한달 동안 관군과 의병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던 중 5월 경 신지수의 군사가 적진에 가까이 가서 불을 지르려 하다가 적군에 발각되어 퇴군하였다. 적군은 의진이 후퇴한 틈을 이용하여 의병에 조력한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이 때 그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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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삼(趙應三) 1875.08.14~1956.06.25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1907년 8월 23일 정봉준 의진에 입진하였다. 당시 정미7조약에 이어서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서울의 시위대와 강화도의 진위대가 의병으로 전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보다 대중화되었다. 이에 강원도 원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의병장 이은찬.이구재가 5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7월에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이를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 창의 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소모하였다. 이리하여 원주를 중심으로 하여 13도 연합 의진이 구성되고 있을 때, 이에 고무를 받은 조응삼은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를 가지고 지평.원주 등지에서 9월 중순까지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직후 그의 부대는 이인영의 13도 연합 의진 휘하에 흡수되어 서울 진격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체포된 조응삼은 공주지방재판소로 압송되어 소위 폭동죄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