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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동(申泰東) 1902.03.20~1959.01.30 / 3.1운동 / 대통령 표창 1919년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계획에 동참하여 경고문을 인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당시 서울 중앙학교에 다니던 신영호는 고향 청주로 내려오는 길에 수원에서 '아(我)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제목의 독립사상 고취 경고문을 입수하여 3월 9일 아침 청주농업학교 기숙사에 도착하였다. 이때 동교 학생이던 신태동은 임창수.이철우.박승하 등 학생들과 함께 김현구의 집으로 가서 함께 경고문 3백여 매를 등사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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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주(金國柱) 1891.04.03~1957.07.20 / 정의부 / 건국훈장 애족장 1908년 3월경 부친 김병철을 따라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1922년 8월에는 봉천성 환인현에서 채상덕.김동삼 등이 조직한 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통의부 제4중대의 3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무장대원 12명을 이끌고 소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간도에서 조직된 정의부의 소대장으로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무력항쟁을 수행하다가 1945년 길림성 쌍성진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일(曺秉一) 1886~1920.11.26 / 만주 방면 / 건국훈장 애국장 만주에서 독립군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으며,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7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특히 1920년 상반기에는 삼둔자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투쟁도 전개되어 일본군들을 자극하였다. 이에 일본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군대출병의 명분을 갖고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병일은 길림성 연길현에서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다가 1920년 11월 26일, 연길현 양지촌에서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