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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규(金弘奎) 1876~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서울 출신의 천도교인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당시 수송동에 있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보성사의 공장 감독으로서, 2월 27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월보과장이며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도록 부탁 받았다. 이에 이날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다른 직공들과 함께 약2만1천매의 선언서를 인쇄하여 이종일에게 넘겨주어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모인 독립만세 시위군중 및 전국 각지에 배포하여, 민족적인 거사를 계획대로 추진하게 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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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의(朴容義) 1869.12.08~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4월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용의는 손병희 등이 주도한 독립선언에 대한 소식을 듣고, 1919년 4월 9일경 장강환.김응순 등과 4월 10일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4월 9일 오후 송원흥 등에게 거성리 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4월 10일에는 거성리 주민 20~30명을 설득하여 거성리 시장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용의는 4월 23일에도 장강환과 함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설득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자 안협면 헌병분견소에 가서 갖고 간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체포된 박용의는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추성열(秋成烈) 1887.02.13~1970.09.09 / 3.1운동 / 대통령 표창 1919년 4월 1일 음성군 소이면 한천 시장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만세시위의 당위성을 설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 행진을 하던 중 소이면 경찰관 주재소에 동지인 김을경 이중근이 검거되자 군중을 향하여 구금자 탈환에 전력을 다하자고 절규 고무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그해 5월 22일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24일 경성 복심 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