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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 1862. 7. 25~1905. 11. 30)은 서울 견지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개화정책을 지지하여 갑오내각에서 1895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아관파천 후 특명전권공사로서 제정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고, 그후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그는 서구 각국을 견문하고 돌아와서 고종에게 우리나라도 대대적인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 민권을 확장하여 독립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고, 육군 제도만이 일부 개혁되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더불어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을사 5적의 탄핵으로 평리원에 대죄하다 석방되었고, 11월 30일 귀가 하는 길에 부하였던 이완식의 집에 들어가 동포와 각국공사들에게 영결하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자결 당시 그의 유해는 용인군 수진면 토월리에 평장되었다가 후손들에 의해 1942년에 현 묘소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