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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565-4 김혁공원 내 오석 김혁 선생 독립운동기념비 김혁장군은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에 산업의 진흥과 아울러 무력투쟁을 계획하여 백두산 아래 화룡현(和龍縣)에 자리잡은 대종교 총본사(大倧敎總本司)와 백두산 동북쪽인 왕청현(汪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던 흥업단(興業團)의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봄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 일(徐一)과 경리담당인 계 화(桂和)가 계속 병력증강에 힘써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지에서 약 300여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또 이성규(李成奎)를 국내로 보내어, 대한제국시대의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홍충희(洪忠熹)·김찬수(金燦洙)·박형식(朴亨植) 등을 동반하여 올 때 그도 유우석(柳佑錫)과 함께 무송현(撫松縣)으로부터 와서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2년 8월 30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교회(韓僑會), 대한광복단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북독판부대표 및 통군부 대표 등 8개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하여 조직된 통의부(統義府)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사령장 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